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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4. 14世 〉6. <요재공>진용교위행의흥위부장공휘정의천장(進勇校尉行義興衛部將公諱廷義薦狀)
1. 문헌 목록 〉14. 14世 〉8. <요재공>병자칠의사호남창의관봉안문및상향축문(丙子七義士湖南彰義館奉安文및常享祝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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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요재공>병자창의칠의사충의비문(丙子倡義七義士忠義碑文)
병자창의칠의사충의비문(丙子倡義七義士忠義碑文) 朝鮮朝 南倭와 北胡의 侵寇에 나라의 危難을 救하고자 일어난 義兵은 民族正氣의 脈搏이요 民族正義의 발로로 韓民族史에 흐르는 魂이로다. 蘆嶺南쪽은 邦國의 藩屏으로 義兵이 策源地였던 바 寶城의 淳昌趙氏 一門 七義는 이 義兵精神을 具現한 본보기이니 趙廷亨 廷顯 弘國 昌國 興國 舜弼 舜立의 七義士는 麗末檢校門下侍中을 지낸 玉川府院君 忠獻公 農隱先生 諱 元吉의 後孫이며 通訓大夫 海南縣監 清庵公 諱 之漢의 孫 曾玄인 服親들로 寶城에 世居하여 忠孝로 顯達한 家門의 出身이다. 仁祖 一四年 一六三六年 丙子 十二月에 清에 太宗이 龍骨大 等을 앞세워 十萬大軍으로 怒濤와 같이 侵寇하여 옴에 妃嬪과 王子들은 江華로 옮기고 뒤따른 大王은 길이 막혀 世子와 같이 南漢山城에 播遷하여 清軍에 包圍되니 山城은 兵力과 軍糧이 不足하여 存亡이 朝夕間에 놓인 緊迫한 情勢였다. 이에 大王은 勤王敎書를 내려 義旋의 來援을 求하니 諸道의 義兵이 倡起하였다. 光海君은 明·金과의 外交를 잘 操縱하였으나 反正한 仁祖는 崇明排金策을 써서 仁祖 五年 一六二七年 丁卯胡亂을 야기 後金의 汗과 兄弟之誼를 맺고 講和하는 屈辱을 치루었는데 仁祖 一四年 四月 後金의 汗인 太宗이 稱帝하고 國號를 清이라 고쳐 朝鮮에 稱臣하기를 強要하자 仁祖大王은 斥和戰守로 나가 宣戰敎書를 내리자 清太宗이 親히 侵冠하여 와서 中原攻略의 障碍를 덜려고 함이 丙子胡亂이다. 勤王敎書가 내리자 寶城에서는 隱峰 安邦俊의 首倡으로 列邑에 檄文을 띄워 擧義할 것을 激勵하자 이때 淳昌趙氏門中의 同知中樞府事 諱 弘國은 從叔父인 諱 廷亨과 察訪 諱 廷顯에게 「生에 義를 取함에 지금이 바로 때가 아니오리까. 國家의 危難에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으리까.」 호소하였고 諱 舜弼은 「비록 草野匹夫인들 宗國이 傾覆되는 것을 坐視할 수 있으리오. 倡義赴難하여 宗社의 危急을 救하는 것이 臣子의 當然한 道理로 생각하옵니다.」 하고 獻議하여 服親七義로 擧義하니 一門七義의 稱頌이 높았었다. 長興 樂安 興陽 昇州 羅州 등지 義士가 安邦俊先生을 義兵將으로 삼아 義陣을 정비하니 仁祖 一五年 丁丑 正月이었다. 義陣은 長城 金溝를 거쳐 礪山에 이르러 湖南列邑 義兵과 合勢하여 清州로 進軍할 즈음 江都가 陷落되어 妃嬪과 王子가 清軍에게 잡힌 바 되었다는 悲報를 接한 仁祖는 正月 三十日 三田渡의 受降壇에서 清太宗에게 降伏하고 稱臣하였으니 이보다 더한 民族의 恥辱이 있으랴! 痛憤할 뿐이로다. 廟堂에서 紛爭하던 主戰論과 主和論이 孤城에서까지 그 交熾를 더하여 降書를 草한 者와 찢은 者가 있었으니 어찌 宗社가 保全되리오. 洪翼漢 尹集 呉達濟의 抗節은 萬代의 殷鑑이요 崔鳴吉의 和議는 一時의 彌縫이었다. 壬亂 七年에도 國威를 圖謀하였거늘 十余日의 胡亂에 겪은 恥辱은 萬古에 없는 일이었다. 罷兵歸鄉한 義士들은 이듬해 斥和三學士의 忠節을 기리고자 諱 弘國 諱 舜弼 諱 鳴國의 壻 文希舜 朴長春 安厚之 等 三十七人의 丙子倡義 諸公들로 新亭契를 맺고 亭子川 巴羅洞(芦洞草田)에 大明社를 設壇하여 春秋로 追慕하며 隱居하였으니 新亭契는 國恥雪辱의 盟約이었다. 一門七義인 諱 廷亨 諱 廷顯은 軍資監 僉正 諱 琪의 子이고 諱 弘國 諱 昌國은 戶曹參議 諱 廷美의 子이고 諱 興國은 禦侮將軍 訓練判官 諱 廷式의 子이고 諱 舜弼 諱 舜立은 諱 季龍의 子로 壬亂義兵將 進勇校尉義興部將 諱 廷義의 孫이다. 諱 廷義 諱 廷美 諱 廷式은 兵曹參判 諱 瓘의 子이고 諱 瓘과 諱 琪는 海南縣監 清庵 諱 之漢의 子이니 七義士는 清庵公의 直系孫들로 世襲忠義의 義士들임을 알리로다. 朝鮮은 清에 事大하다가 一八九七年 光武 元年에 大韓帝國으로 自主獨立되었으니 冥冥中에 계시는 七義士의 英靈도 기쁨이 있으리로다. 七義士의 氣慨와 節義는 나라의 命脈이요 겨레의 義氣로 無等山의 彰義館에 享祀되었으니 永遠한 國祚와 함께 길이 겨레의 爼豆를 받으실 것이다. 寶城은 丙子倡義의 義鄉이다. 오늘날에도 淳昌趙氏 寶城門中과 같은 七義의 例가 없으니 그 忠義, 겨레의 龜鑑으로 높이 빛날 것이다. 丙子倡義 三五七年을 맞아 後孫들이 정성을 모아 七義先祖의 忠節을 기리고자 忠義碑를 세움에 銘을 請한 邦基 瑩基 啓賢 甫의 갸륵한 뜻을 받아 史官은 隱峰倡義錄에 典據하여 趙門七義士의 節義를 金石에 刻하여 千秋에 傳하게 하노라. 開天四三三六年(一九九三)癸酉陰十月 日 國史編纂委員會 編史官 民族運動硏究會 會長 金厚卿 謹撰 清庵公 諱 之漢 十四世孫 仝基 謹書 淳昌趙氏 玄洲公派 宗會長 化翼 外 僉宗 竪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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